할머니의 도라지
"할머니는 도라지를 까서 파는 노점상이셨다."
내가 생각나는 할머니의 모습은 큰 다라에
도라지를 한가득 담아서 까는 모습이였다.
빠른 나이에 백수의 길을 들어선 할아버지 대신
우리가족 생계의 일부는 할머니의 도라지 판 돈이였다.
오전은 도라지 까는 냄새가 온 집안을 감쌌으며,
오후에는 할머니가 그 큰 다라를 머리에 이고 어리론가 사라지셨다.
아마도 경동시장 근처 지하철 역 앞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 아버지의 요식업이 자리를 잡아가는 시점에
더 이상 도라지 냄새는 우리집에서 사리지게 되었다.
도라지 장사를 그만두기게 하기까지
아버지가 그 노점앞을 가서 다라를 몇번이나 뒤집었는지 모른다..
집에가는 집앞 정류소에 야채를 놓고 파시는 할머니를 종종 본다.
쌀쌀해진 가을날씨 뒤에 곧 다가올 겨울과
통행에 불편을 준다며 인상찌 푸리는 행인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뜬금없는 5천원짜리 야채 봉지에 와이프 핀잔이 두렵지만 할머니 생각에 귀가하는 발걸음은 가볍다.
할아버지의 담배
"할아버지의 담배의 이유를 알아 갈 무렵, 내 곁에 할아버지는 없었다"
할아버지는 담배를 정말 많이 피우셨다.
내 방같은게 존재할리 없는 대가족 시절에 할아버지,할머니 방은
곧 손자의 방이기도 했다.
같은 방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 공간의 주인들이 모든 냄새를 공유한다는 의미이다.
연신 피워대는 할아버지의 담배냄새를 미워하고,
동네 구멍가게 담배 심부름의 주역이기도 했던 나는
평생토록 담배 따위는 피우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곤 했다.
군입대 후 인생의 쓴 맛을 경험한 나는
그 쓴맛을 잠깐이나마 해소할 수 있는게 폐속 깊숙히 스며드는 담배 한모금이라는 걸
알아 버렸고, 그제서야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많은 담배를 피웠는지 알게 되었다.
입소한지 1년쯤이 지난 군 시절. 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접하고
분향소로 가는 길위에서 펑펑 울던 20대 청년인 나는
그제서야 평생 나를 사랑해 주셨던 할아버지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담배의 이유를 알아 갈 무렵, 내 곁에 할아버지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