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람 호인 김부천을 기억하며..
아름다운사람 호인 김부천을 기억하며..

아름다운사람 호인 김부천을 기억하며..

10 참여자

부천형의 사고 하루 전

약 2달만에 대화를 하게 되었고
가족들과 많은 인파가 있던 아울렛을 돌면서도 그날따라 반가운 마음에 한시간여 꽤나 오랜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천형은 아얘 시민권을 따야하나 고민하고 있었고
나는 호주에서 평생 살꺼냐며 부천형이 공장현장에 전업한지도 모른채
무심코 한 마디를 던졌다

"한국으로 와서
레스토랑 하나 차려"

그 짧은 순간에 문득 모두 50중반의 우리의 모습이 그려졌다

형의 레스토랑에서 형이 요리늘 해주는 걸 기다리는 나와 한쪽에서 글을 쓰고있는 필식형, 창밖에 풍경을 사진 찍는 승재의 모습....

"난 그럴 깜냥이 안돼 ㅋ"

라고 말하는 부천형의 한마디에 그 순간이 사라졌음에도

사고 이후.. 그 평범하게 그려진 단 하루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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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글-
김부천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김부천의 삶에 관하여 짧게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는 1980년에 태어나 2025년에 세상을 떠났다. 나와 친구가 된 건 1999년이었으니 우리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친구로 지낸 셈이다. 사실 내 이삼십대 시절의 추억을 얘기할 때 김부천을 빼고 설명한다는 건 완전할 수가 없다. 그를 빼면 할 얘기가 별로 없다. 때문에 김부천이 죽었다는 건 내 청춘이 이제 정말 끝났다는 걸 의미한다. 그는 이제 돌아올 수 없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다. 호주에서 뼈를 묻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슬퍼하는 일밖에 없었다. 무력감 앞에서 슬픔을 표현하는 것조차 사치로 느꼈다.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김부천 그는 누구인가, 라는 주제로 그의 삶을 감히 내가 뻔뻔하게 돌아보려고 한다. 그럴 필요가 있다. 김부천은 로맨티스트이다. 본인 스스로가 정의내린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 시절 나는 그러한 그의 캐릭터를 놀리기에 바빴고 로맨틱이라는 건 그저 여성스럽고 나약하고 느끼한 뭔가로 인식할 뿐이었다. 그가 두껍게 썬크림을 바르면 나는 그걸 남자가 화장한다며 놀렸고, 군대에서 기초세안을 위해 쌀뜨물을 찾았다는 루머는 아직도 전설로 남아있으며, 간드러지는 그의 노래창법은 닭살 돋는다며 야유를 퍼부었고, 약간은 과하다 싶은듯한 그의 패션센스나 색상조합은 나의 단골 조롱거리였다. 항상 친구나 지인들 안부를 필요 이상으로 묻고 챙길 때는 오지라퍼라며 구박을 주었지만 그래도 그는 그 무엇보다 우정과 의리 또는 사랑과 연애에 관한 관심이 참 많았다. 나는 그러한 김부천에게 로맨티스트라는 말을 놀림거리로 썼다. 가끔 그의 로맨틱을 이용해먹기도 했다. 우리 엄마 생일때 게으른 내가 미처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을 때면 김부천을 우리집으로 불러 엄마에게 대신 꽃선물을 시키고는 했다. 김부천이 영종도의 작은 신혼아파트에서 아내에게 프로포즈 이벤트를 할 때는 이번에는 그가 나를 불러 수십개의 촛불에 불을 붙이는 중노동을 시키기도 했다. 나는 그 오글거리는 이벤트에 몸서리치며 두 커플에게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김부천은 로맨틱한 만큼 꿈도 욕심도 많은 친구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계속 공부를 하고 싶어했다. 대한민국 청년 치고 펜대 굴리며 가방끈 늘리는 일에 대한 동경 없는 사람 없겠지만 그는 묵묵히 꾸준하게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나갔다. 그 과정은 지난했다. 해가 바뀌면 소속 대학교의 학생증이 바뀌어 있었다. 몇 개의 학부를 거쳐 대학원까지, 나는 그에게 인서울대학 학생증 다 수집할거냐고 놀렸다. 그 과정 속에서 서른이 되고 취업할 나이가 슬슬 차고 넘어가는 시점에 이르러서도 김부천은 늘 학생이고 늘 준비생이었다. 만나면 언제나 영어를 공부했고 뭔가를 준비중이었다. 그 시점에서도 김부천은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어하는지, 무슨 직업을 갖고 싶어하는지 명쾌히 말하지는 않았다. 아니, 무심한 내가 어쩌면 흘려듣고 기억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점점 지쳐가는 것이 보였다. 좁고 좁은 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세월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길을 돌려 다른 길을 찾아간다. 그리고 몇번의 시행착오를 하다가 적당한 어딘가에 정착하여 밥벌이를 하며 살아간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 운좋게 쟁취한 자리, 어렵게 얻어낸 영달, 이런 것들을 자양분 삼아 사람들은 꿈과 이상을 내려놓는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은 그렇게 살아간다. 그것이 현실이다. 세상 사람 모두가 꿈을 이룬다면 그 세상은 폭발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게 현실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인생과 타협을 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김부천은 그때까지도 망설이는 듯 보였다. 용돈 벌이라는 명목으로 작게 시작한 커피전문점 아르바이트에서 거대 규모의 국제적 프랜차이즈 브랜치의 매니저로 변모하는 과정을 겪으면서도 김부천은 충분히 행복해하지 못했다. 여전히 꿈을 꾸는 청년이었고 여전히 다른 무언가를 준비하는 학생이었다. 인생은 수많은 우연과 순간의 선택이 미묘한 알고리즘을 형성하며 흘러간다. 그 과정에는 설계도가 없다. 어떻게 보면 자연의 흐름이지만 그래도 김부천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직 남아있다고 굳게 믿는 듯했다. 산다는 건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쓰는 일과 같다. 읽어주는 사람은 없어도 그래도 누구나 자신만의 소설이 있고 스토리가 있고 시나리오가 있다. 김부천은 천성이 작가였다. 로맨티스트 작가. 작가에게 글을 쓰지 못하게 하는 건 사회적 구속이나 다름 없다. 김부천은 그 시점에서 인생을 다시 셋팅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것도 지구 반대편에서. 수많은 내적갈등과 현실적 여건을 뒤로하고 그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나는 그의 그러한 고민에 전혀 어떤 조언이나 공감도 하지 못했다. 그럴 능력도 없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가 원하는 것, 우아하고 로맨틱하고 지적이며 낭만적인 그 뭔가를 보여주며 살기를 바랐다. 또한 그는 충분히 그럴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게 다였다. 그렇게 김부천은 아내와 갓 태어난 딸을 데리고 훌쩍 호주로 떠났다. 그렇게 짧지 않은 몇 해가 흐르고, 코로나 시국이 지나고, 우리는 점점 멀어져갔다. 친하다는 명분으로 오히려 안부를 소홀히 챙겼다. 가끔 연락이 올때마다 나는 한국과 호주의 시차가 커서 적응하기 어렵겠다는 싸구려 농담을 했고 그는 허허 웃으며 한시간 밖에 차이 안나니까 괜찮다고 했다. 여름에 연락이 올 때는 더운날씨 힘들겠다고 안부를 물었고, 겨울에 연락이 올 때는 추운데 감기조심하라고 농담을 했다. 그곳은 계절이 반대라는 걸 알면서도 김부천은 그저 허허 웃으며 내 농담을 익숙하게 받아줬다. 그렇게 가끔 연락을 주고 받으며 세월이 흘렀고, 어느날 김부천은 삶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영원히 주저앉았다. 그를 짓누른 건 삶의 무게였다. 그 어떤 꿈과 낭만과 이상도 그 무게를 버텨낼 순 없었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슬픔을 감당하기란 힘든 일이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죽음 자체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쳐도, 사람은 언젠가는 죽으니까 그것이 조금 일찍 온 것일 뿐이라 이해한다 쳐도,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건 그 누구보다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걸 좋아하고 꿈꾸었던 사람이 그런 것들과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방식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것이 허망했다. 그는 그런식으로 떠나면 안되는 친구였다. 이럴거면 왜 굳이?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고향 안양에서, 그를 그리워하는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김부천의 어린 딸이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들고 걸어가는 사진을 보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그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그의 꿈은 바로 가족이었다는 걸, 모든 자존심과 욕망을 기꺼이 접어놓으면서까지 그 험한 길을 굳이 걸으며 버텨내려 했던 이유는 바로 가족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김부천은 진짜 로맨티스트였다. 감히 내가 범접하지 못할, 함부로 놀려서는 안 될 그의 로맨틱을 나는 존경한다. 김부천이 쓰고자 했던 낭만적인 스토리는 그렇게 갑작스럽고 허무하게 마무리되었다. 1975년, 영화감독 이만희는 그의 마지막 작품 '삼포 가는 길'의 촬영 도중 급작스러운 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미처 완성하지 못한 남은 분량은 급하게 편집으로 마무리하여 개봉되었는데, 그 허전한 결말은 오히려 역설적인 아름다움마저 느껴지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김부천 이사람의 갑작스러운 스토리의 결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지나간 세월을 추억에 빠져 기억할 때 아름다웠다는 얘기를 하곤 한다. 하지만 정말 그 세월을 살았을 현실의 순간에도 아름다웠을까? 훗날 떠올린 기억이 아름다운 이유는 편집의 필터를 거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편집이 되지 않는 영화를 하루 하루 찍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지루하고 지겹고 힘겹다. 하지만 김부천은 늘 영화처럼 살기를 원했고 자신의 스토리를 그리며 살아갔다. '삼포 가는 길'처럼 허무한 종결을 맞이할 수밖에 없지만, 김부천의 삶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멋진 영화로 만드는 건 우리의 몫이다. 그의 삶은 허망하게 꺾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의 청춘은 영원히 박제되었다. 반대로 나는 늙어갈 것이다. 이제 늙어가는 내가 의지할 술안주는 청년으로 기억되는 김부천과 함께 보냈던 청춘의 시간들. 백수 시절 서로의 집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목적없이 함께 걸어다니며 눈에 띄는 아무 집이나 들어가 먹고 마시던 밥과 술. 평일 오후의 나른한 공기와 햇살. 남산도서관 앞 무작정 들어간 엉클조 소시지집에서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벌벌떨며 서로 아무말 없이 맥주 한잔씩만 마시고 나오며, 우리 다음에 현금 백만원씩 들고 여기 다시 와서 테이블에 쌓아놓고 미친듯이 마시자고 했던 약속. 이젠 지킬 수 없게 됐지만, 앞으로 점점 그리워질 테니까, 나는 혼자서라도 다시 갈 것이다. 그동안 고마웠고 즐거웠다, 내 친구. 이젠 시차 없는 곳에서, 겨울 없는 곳에서 로맨틱하게 기다리고 있어. 언젠가 다시 만나자. 안녕

🕊️ 추모 및 가족 지원 모금 안내문

[먼저 떠난 김부천을 기억하며]

지난 9월 8일,
호주 퍼스(Perth)의 한 공장에서 일하던 99학번 김부천 학우가 예기치 못한 산업재해 사고로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99학번 김부천 학우는 항상 주변 사람들을 미소와 배려로, 그리고 진심으로 맞아주었던 친구였습니다.

그는 먼 호주에서
어렵게 정착을 하면서도
항상 한국의 친구들을 잊지 않고
먼저 챙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가족들을 사랑했고,
동료들에게 늘 따뜻했으며,
누구보다 성실한 가장이었습니다.

그의 아내(01학번 최지희)와 자녀(김하온양 10세)가 이 어려운 시간들을 한국에 있는 우리들과 조금이라도 함께할 수 있도록, 작은 마음을 모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정성이
호주에 남은 가족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모금계좌
예금주 : 김부강(김부천 친동생)
계좌번호 : 국민은행 821101 04 001421

10월 6일까지, 3일 동안만 모금하겠습니다. (문의 00학번 박지훈 010-4605-2982)

김부천 학우는 지금 호주 땅에서 영면에 들어갔지만, 재해사고 처리가 마무리 된후 내년 쯤에는 유골 일부가 한국으로 들어올 예정입니다.

메모리얼 - 온라인 추모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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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memorial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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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추모관을 만들고 공유할 수 있는 온라인 추모 서비스, 사용자간 커뮤니티 및 전문가 상담 서비스, 추모/치유 관련 콘텐츠 제공

아마도 2007년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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